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상식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최우수 작품상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수상하였다. 시상식의 피날레로서 최우수 작품상이 호명되자 한국에서 참석한 모든 영화 관계자 (배우, 제작자, 스태프 등)가 무대에 올라 자축했다. 그리고 이어서 제작자인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 대표가 발언했고, 이어서 배급, 유통사인 CJ의 이미경 부회장이 발언했다.
이를 두고 이미경 부회장에 대한 비판이 꽤 나오는 모양이다. 사실, 인터넷 댓글이 국민의 의견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 즉 대표성이 전혀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필자로서는 그 비판조차도 의심스럽지만, 그 비판이란 이렇게 몇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 대개 제작자와 감독에게 소감 발언 기회가 주어지는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에 배급 유통사 대표가 (뜬금 없이) 왜 발언하였는가? 둘째, 배급, 유통사 대표가 제작자에 이어 소감 발언 기회가 주어지는 것 자체가 거대 자본에 대중 문화 예술계가 잠식당한 한국의 현실을 반영한다. 셋째, 꼭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었나? 넷째, CJ와 그 회장 (이미경 부회장의 형제)은 왜 언급하였는가?
이미경 회장에 대해서 필자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우리나라 대중 문화, 예술계를 지난 수십년 동안 지배해온 거대 기업의 영향력 있는 큰 손이라는 점, 최순실, 차은택과 더불어 부패 재단을 만들어 문화예술계를 강탈하려고 했던 꼭두각시 박근혜에 찍혀 당시 직책에서도 물러나고 곤욕을 치뤘다는 점, 이 둘 뿐이다. 그녀와 필자는 아무런 관련도 없지만, 이미경 부회장을 향한 위 비판점에 대해 변론을 펼치고자 한다.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에서 관례적으로 제작자가 소감 발언을 해왔다고 해서, 배급, 유통사가 발언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제작부터, 기획, 연출, 촬영과 연기, 유통, 배급, 홍보에 이르기까지 한 덩어리의 거대한 집합체인데, 그 중 한 명이 발언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더군다나 이미 제작자가 소감 발언을 마친 마당에, 이미경 부회장이 아니라, 송강호 배우, 혹 박소담 배우가 발언 기회를 잡았다 한들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이미경 부회장 대신에 조여정 배우가 소감을 말했어도 이토록 비판이 쏟아졌을 것인가? 곽신애 대표는 수상 후 기자회견 장에서, '최우수 작품상은 어느 한 개인이 아니라 작품에 참여한, 엔딩 credit에 올라간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상'이라고 발언했다. 즉 최우수 작품상 소감은 credit에 오른 누가 말했어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는 것이다. 이선균 배우나 한진원 작가가 소감을 말했다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어야 했다. 심지어 이미경 회장은 배급, 유통뿐만이 아니라 제작, 투자까지 맡은 사람이다. 이미경 부회장의 소감은 관례에 전혀 어긋나지 않은 셈이다.
기생충이라는 작품과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를 비롯한 각종 영화제의 정점에 서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준 것은 명백한 사실이나, 기생충이 이토록 전세계, 특히 북미에서 찬사를 받기까지 배급, 유통사인 CJ 및 Neon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기생충 이전에도, 봉준호 감독의 전 작품들(괴물, 살인의 추억)을 비롯하여 수많은 수작들이 많이 있었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 이창동 감독의 밀양 등) 그러나 (봉준호 감독이 말한) 1인치의 자막이라는 장벽을 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기생충이 이 정도 최우수 작품상을 받을 정도라면, 위 네 개의 작품은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에 최소한 후보에는 올랐어야 형평에 맞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기생충은 처음 제작, 투자 단계부터 영어로 번역하여 북미에 개봉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한 자금력이 뒷받침해주고 있었으며, 봉감독이 옥자, 설국열차 등으로 이미 북미에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상태였기에 그나마 북미의 주목을 받고, 꽤 많은 상영관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CJ 이미경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아니었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한국 감독 중에서는 그래도 제일 해외에서 인정을 받고, 국내에서 탄탄한 재정적 지원을 받는 봉준호 감독조차도 설국열차 북미 개봉 당시 Harvey Weinstein이라는 할리우드의 거물이자 괴물로부터 20분 가량을 삭제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봉 감독은 이를 거절하였기에 결국 설국열차는 제한적 상영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북미 개봉관도 제대로 확보할 수 없었다. 그 더러운 성폭행범 Harvey Weinstein의 성추문 사례가 만일 미투운동으로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할리우드의 거물로서 기생충에게도 가위질을 하려 했을 것이고, 기생충은 또 다시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받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과정 속에 투자, 배급, 홍보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CJ 이미경 부회장의 노고가 작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칭송해마지 않는 할리우드는, 작품성을 겨루는 곳이라기보다는, 더 정확한 표현은 '자본력'을 겨루는 각축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대 자본이 닿아있지 않는 작품은 수상 후보는 커녕 주류인 할리우드 내에서 최소한의 상영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최우수 작품상 소감 연설 때 상황은 이러했다. 먼저 곽신애 대표가 이런 결정을 내려준 모든 아카데미 회원분들께 감사를 드린다고 소감의 끝을 맺었다. 오스카 전체 쇼의 오버 타임으로 기획자가 맘이 급했던 탓인지, 기생충 영화 관련 한국 사람들이 모두 무대에 나와 있는 상황에서 곽신애 대표의 짧은 소감이 끝나자 관계자는 갑자기 무대의 조명을 다 꺼버렸다. 한국 영화의 최우수작품상 수상에 기뻐하며 시청하던 한국 사람으로서는 무척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관객들 (카메라엔 톰 행크스의 모습이 크게 잡혔다.) 다수가 불을 다시 켜라고 (소감을 더 듣고 싶다는 뜻) 함께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질렀고, 다시 조명이 들어와 발언 기회가 한 번 더 생긴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기까지 수백, 수천 번의 인터뷰에 응하고 소감을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는 이를 '캠페인'이라고 칭할 정도로 정말 길고도 집요한 과정임을 인정했다. 원래 기생충이 뜨기 전부터 예정해놓은 빡빡한 북미 홍보 일정이 있었으며, 수십 개의 전 세계 영화제 시상식에서 수상을 하며 소감 발언을 해야만 했고, 수십 개의 상영회에 참석하여 같이 영화를 보고 관객들과의 만남 시간을 가져야 했다. 수 많은 미디어와 인터뷰를 했고, 미국, 혹은 서구권의 특유한 문화인 스탠딩 파티에서 각국의 영화계 거물들과 만나 친목도 다져야 했다. 당장 아카데미 당일만 하더라도 레드카펫을 걸어가는 동안 세 명 이상의 생중계 언론인들에게 붙잡혀 인터뷰를 했으며, 각본상, 외국어영화상, 감독상으로 이미 세 번의 소감 기회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한 상태였다. 심지어 수상 후 기자회견 자리에서는 '영화를 실제로 촬영한 기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각종 시상식에 참여하여 다양한 수상소감을 말하느라 이제는 수상소감 소재가 고갈된 나머지, 밤새 술마시겠다라는 표현까지 했다.' 라는 발언을 했다. 이미 이전 다른 시상식에서는 "비건 버거 마저 먹겠다." 라는 소감발언까지 나온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품상의 발언 기회를 봉준호 감독이 수십 년 간 한국 문화예술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은 투자배급사 대표에게 양보한 것이 무에 그리도 비판받을 만한 일인가?
그리고 이미경 부회장이 자회사인 CJ를 언급하며 홍보했다는 것은 가짜 뉴스이다. 그녀는 CJ를 입에 답지 않았다. 다만 이재현 회장(Jay)을 언급하며 감사를 표했을 뿐.
최광희라는 평론가는 본인의 페이스북에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에서 제작자나 감독이 아닌 투자배급사 대표가 소감을 발언한 적이 없고, 심지어 기생충 credit에도 없다고 하는데 너무나 엉터리라 이런 사람이 평론가로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단언컨대, 나는 이 최광희라는 평론가보다는 영화 평론 글을 더 잘 쓸 자신이 있다. 우선, 아카데미 90여년의 역사 상, 최우수 작품상 소감에 제작자와 감독이 아닌 투자배급사 대표가 소감을 발언한 전례가 단 한 번도 없는지는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때로는 제작사와 투자배급사가 동일하거나 경계가 모호한 사례가 종종 있으므로 이 발언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기생충의 credit에는 '제작투자 이미경'이라고 당당히 단독으로 이미경 부회장의 이름이 나온다.
제/작/투/자/이/미/경!!!!!
이 정도면 최광희라는 평론가는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다른 직업도 그닥 잘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설령 투자배급사 대표는 소감을 발언한 전례가 없다고 치자. 아카데미는 백인 일색, 미국 중심주의라는 틀을 과감히 깨고 한국의 영화와 감독에게도 최고의 영예를 선사하는 파격을 보였는데, 고작 우리는 그 정도의 파격도 보이지 못하는가? 할리우드 중심의 영화판에 태극기를 꽂고 온 이들에게 소감 연설의 작은 선례를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이야말로 굴욕적인 사대주의가 아닌가?
봉 감독의 이 천재적이고도 위대한 성과는, 역설적이게도 봉 감독만의 공로가 아니다. 2019년, 한국 영화는 백주년을 맞이했다. 백여 년 동안,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던 시기와 독재로 신음했던 그 긴 시간동안 한국 영화는 표현과 예술의 자유를 지키고자 투쟁했고, 수많은 무명의 영화인들의 노력에 의해 명맥을 이어왔다. 바로 그 누적된 집약체로서 기생충의 최우수 작품상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인고의 시간동안 한국 영화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이미경 부회장, 그녀가 그 자리에 있는 누구 못지 않게 감격스러웠으리라.
이미경 부회장을 높이 평가해주고 싶은 것은 그녀의 훌륭한 소감 연설 때문이다. 그녀는 원어민과 같은 유창한 액센트로 직접 영어로 소감을 이야기했다. (구어체라 약간의 어색함은 넘어가자.) 아래 영상과 전문을 살펴보자. 한글로 필자가 번역해 보았다.
유튜브 영상: Parasite Accespts the Oscar for Best Picture (최우수 작품상: 기생충)
Hi, everybody.
모두 안녕하세요!
I really like to thank Director Bong. Thank you. Thank you for being you.
나는 봉준호 감독에게 정말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당신이 당신다워서 감사해요.
And I like everything about him, his smile, his crazy hair, the way he talks, the way he walks, and especially the way he directs.
나는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좋아합니다. 그의 미소도, 그의 난잡한 머리카락도, 그가 말하는 방식도, 그의 걸음걸이도, 그리고 특히 그의 연출 방식을요.
And what I really like about him is his sense of humor, and the fact that he can be really making fun of himself and he never takes himself seriously. Thank you. Thank you very much.
그리고 내가 그에 대해 정말 좋아하는 것은 그의 유머감각이에요. 그리고 그가 그 자신에 대해 늘 익살스럽고, 그가 절대 스스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좋아해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And I'd like to thank everybody who's been supporting Parasite, who's been working with Parasite, and who's been loving Parasite.
그리고 나는 기생충을 지지해준 모든 분들, 기생충과 함께 일한 모든 분들, 기생충을 사랑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싶어요.
And I'd like to thank my brother who's been always supporting building our dreams even when it looked impossible dream. Thank you, Jay. I want to thank my brother, Jay.
그리고 나는 때로는 불가능한 꿈처럼 보일 때조차도 우리의 꿈을 이뤄나가기 위해 늘 지원해준 내 동생(CJ 이재현 회장)에게도 감사드리고 싶어요. 이 회장 고마워요. 내 동생 이 회장 고마워요.
And especially I really really really want to thank our Korean film audience, our moviegoers, who's been supporting all our movies, and never hesitated to give us straight forward opinion on what they feel like their movies.
그리고 특별히 나는 정말 정말 정말 한국 영화 관객들, 영화 팬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그들은 언제나 우리의 영화들을 지지해주었고, 그들이 우리의 영화들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늘 직설적인 의견을 전달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어요.
And that made us really never be able to be complacent and keep pushing the directors, creators, keep pushing the envelopes.
바로 그 점이 우리로 하여금 절대로 기고만장하지 않고, 감독과, 창작자들로 하여금 한계를 시험하도록 계속 동기 부여를 해줍니다.
And without you, our Korean film audience, we are not here. Thank you very much.
그리고 한국 영화 관객분들, 바로 여러분들이 아니면 우리는 여기에 없었을 거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영화 수상 소감 중에 이토록 한국 영화 팬들에게 직접적이고 진솔한 감사의 표현을 한 공인이 또 누가 있었던가? 정말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이 소감의 Bold 처리한 말미의 연설은 한국 예술문화계 역사에 기록될 최고의 명연설 중 하나라고 나는 확신한다. 한국말로 이야기하지 않고 영어로 이야기해서 일부는 뿔이 난 건가? 영화와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세계의 중심이자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던 미국 영화인들 앞에서, 한국 영화가 최우수 작품상을 탄 것도 모자라, 소감에서 다름 아닌 '한국 관객'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 것. 이것이야말로 일대 사건이 아닌가?
각종 한국 연말 시상식에서 눈물 쏟느라 발언도 똑바로 못하고, 술자리나 집에서 혼자 배출할 감정의 무게를 카메라 앞에서 응석받이하듯 내쏟고, 어버버하는 모습, 겸손이 미덕인 양 소감의 서두를 공허한 겸양과 자기 비하로 날려버리는 천박하고 한심한 작태들만 보다가, 지난 며칠 각종 해외 시상식을 통해 늘 시원시원하고 간결하지만 핵심이 담긴 말을 전달하는 봉준호 감독의 소감, 인간애와 배우의 소명에 대해 자각하는 송강호 배우의 소감, 그리고 미국 한복판에서 한국 영화팬들을 향한 깊은 감사를 전하는 이미경 부회장의 소감을 들으니 속이 후련하다. 정말 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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