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 작가의 3부작 영웅문은 중국 무협 소설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작이다. 신필(神筆)이라고 불리우는 작가의 튼튼한 서사구조와 세심한 인물 설정, 개성있는 캐릭터는 몇 번을 읽어봐도 탄복하게 만든다. 3부작은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로 구성되어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인 세계관을 구축한다.
그 중 3부인 '의천도룡기'는 특히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 1, 2부에 비해 주인공이 다양한 여성과 로맨스로 엮여 있어 더 다양한 팬층을 확보할 수 있다. 이는 영화부터 드라마, 만화에 이르기까지 여러 포맷으로 제작되었다.
이토록 탄탄하고 훌륭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읽는 내내 가슴이 탁 막힌 듯한 답답함을 몇 번이나 지울 수 없다. 작가의 허술함인지, 아니면 이처럼 방대한 서사를 풀어내기 위해서 이 정도의 부족함은 불가피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개인적으로 이해가지 않는 부분을 짚어보고자 한다.
1. 은소소는 대체 왜 그와 같은 원망을 들어야 했으며, 대체 왜 죽어야만 했는가?
배경
장삼봉의 제자로 이름을 날리는 무당 칠협 중의 한 명인 오협 장취산은 천응교 교주 백미응왕 은천정의 딸인 은소소와 결혼하게 된다. 우연히 접한 도룡도의 비밀을 풀고자 무당으로 향하던 삽협 유대암을 은소소는 독침으로 공격하여 부상을 입힌다. 악의는 없었기에 용문표국의 도대금을 찾아가 부상 당한 유대암을 무당으로 안전하게 호송할 것을 의뢰한다. 단, 임무에 실패할 시 용문표국 사람들을 모조리 도륙하겠다는 협박을 한다. 용문표국은 무당산에 이르러 무당파 사람들로 위장한 서역 소림파 무리들에 속아 유대암을 넘겨주게 되고, 유대암은 그들의 대력 금강지에 당해 관절과 힘줄이 모두 상해 다시는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된다. 유대암을 납치한 이들에게 은소소가 덤벼보았지만 정작 본인도 부상을 입고 만다. 이후 용문표국을 찾아가 임무 실패의 침입을 물어 전원 몰살한다.
무당파의 조사인 장삼봉의 생일, 빙화도에서 빠져나온 장취산은 부인 은소소를 데리고 10년 만에 무당산을 찾았다. 여기서 도룡도에 대한 탐욕으로 뭉쳐 금모사왕 사손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나타난 여러 문파들의 겁박을 받게 된다. 소림 3대 고승과의 대결을 위해, 무당의 제자들은 일곱 명의 진을 펼치고자 한다. 불구가 된 유대암의 자리를 장취산의 아내인 은소소가 채우게 되어 보법과 방위를 유대암이 설명할 자리를 마련한다. 이때 은소소가 10년 전 유대암을 독침으로 부상입힌 장본인임이 드러나 유대암은 오열을 하게 되고, 10년 간 부부의 연을 맺으면서도 그에 대한 설명을 전혀 듣지 못했던 장취산은 크나큰 배신감을 느낀다. 장취산은 사형이 불구가 된 데 대한 남편으로서의 죄책감, 사문에 대한 미안함, 의형제인 사손의 행방을 밝힐 수 없는 책임감 등의 이유로 모든 문파들의 앞에서 자결을 하게 되고, 은소소도 그 뒤를 잇는다.
의문
남편의 사형인 유대암을 10년 전 독침으로 쓰러뜨린 이가 은소소 본인임을 남편 장취산에게 내내 숨겨와 약간의 허물이 있다고 한들, 유대암을 독침으로 부상 입힌 것은 얼마든지 회복이 가능한 일이었고, 그를 위해 용문표국에 무당산으로의 안전한 호송을 부탁하기까지 했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인 유대암이 불구가 된 사건은 은소소가 한 것이 아니라 서역 소림파의 악랄한 계략과 공격 때문이었는데, 유대암 본인을 포함한 무당 칠협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재회 자리에서 왜 그토록 은소소에게 원망을 표했던 것인가? 유대암을 결정적으로 불구로 만든 범인도 아닌데, 남편 장취산은 왜 그토록 실망을 한 것인가? 그 상황에서 유대암과 장취산의 반응은 마치 은소소가 유대암을 대력금강지로 불구로 만든 범인일 때나 나올 법한 반응이었다. 설령 그 날 장취산과 은소소가 자결을 하지 않고 목숨을 보전했다 하더라도, 과연 이후 은소소가 장취산과 정상적인 부부관계 유지가 가능했을까?
의뢰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은소소가 용문표국 사람들을 몰살시킨 잔악함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의 잔악함은 의천도룡기 세계관 내에서 정파, 사파를 구분하지 않고 무수히 등장한다. 유대암과 장취산만 은소소의 허물을 용서하고 비호해줬다면 그와 같은 파국을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민은 수 백 배는 더 잔악한 행동을 했어도 여주인공 버프를 받고 비난을 비껴갔으며, 역시 수 백 배 더 잔인한 살겁을 저지른 멸절사태는 정파 장문인에 무공의 고수라는 이유로 역시 비난을 비껴간다. 아마도 이 둘이 살육하고 원한을 입힌 이들은 심지어 작품의 최대 악적인 성곤보다도 많을 것이다. 전혀 형평에 맞지 않는다.
2. 도룡도에 그토록 집착하는 무림인들이 왜 의천검에는 전혀 집착하지 않는가?
배경
무림지존 보도도룡 武林至尊 寶刀屠龍 : 무림의 지존 도룡도라
호령천하 막감부종 號令天下 莫敢不從 : 천하를 호령하니 감히 따르지 않을 자 없도다
의천불출 수여쟁봉 倚天不出 誰與爭鋒 : 의천검이 나타나지 않으니, 그 누가 예봉을 다투랴
유대암이 불구로 된 것부터 금모사왕 사손과 장취산, 은소소가 빙화도로 가게 된 이야기까지, 무림지존이라는 도룡도에 대한 무림인들의 탐욕과 집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악의 제왕 사우론부터 약골 골룸까지 본인의 힘의 세기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들이 절대 반지를 얻기 위한 무한한 탐욕에 이끌리는 것과 비슷하다. 엄청난 보도인 도룡도를 얻게 되면 무림 지존으로 등극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도룡도를 차지하기 위해 죽고 죽이기를 반복한다.
의문
작 중에서 의천검은 도룡도에 비견할 만한 최고의 무기이다. 위 싯귀에 의하면 '도룡도의 힘=의천검의 힘'이라는 공식이 성립힌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병기 다 곽정과 황용이 신조대협 양과가 강호를 떠나며 준 현철중검이라는 같은 재료를 가지고 동시에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는 외날로 된 베기 위주의 도(刀)로, 다른 하나는 양날로 된 찌르기 위주의 검(劍)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도룡도에 그토록 집착하는 무림인들이 왜 의천검에는 같은 수준의 집착을 보여주지 않는가? 금모사왕 사손은 무공이 매우 뛰어날 뿐 아니라 복수심에 불타 늘 공격성을 띄고 주변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도룡도까지 있어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죽여 도룡도를 차지하기 위해 무림인들은 무시무시한 광기를 보인다. 장님이라고는 하지만 작 중 고수인 자삼용왕(금화파파)조차도 함부로 그에게서 도룡도를 가져가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그를 상대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힘을 가진 의천검을 멸절사태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온 무림인이 알면서, 무림인들은 왜 멸절사태나 아미파를 불시에 전혀 공격하지 않는 것인가? 왜 의천검에는 그만큼의 소유욕을 보여주지 않는 것인가? 심지어 도룡도는 사손이 늘 가지고 있지만, 의천검은 때때로 멸절사태가 제자에게 들고다닐 것을 명하기도 한다. 막강한 힘을 얻기 위해 도룡도와 의천검을 선택해야 한다면, 소지자의 소재도 불분명한 도룡도보다는 위치도 분명하고 본인이 늘 몸에 지니지도 않는 의천검이 훨씬 얻기 쉬울 것이다. 멸절사태의 무공도 작중 고수이긴 하나, 금화파파, 청익복왕 등과의 대결에 미루어 볼 때, 도룡도를 지닌 사손보다 딱히 더 강할 것도 없다. 그런데 도룡도를 사왕이라 불리우는 무시무시한 사손에게서 빼앗는 일은 광적으로 집착하는 무림인들이, 의천검을 지닌 멸절사태에게는 왜 덤벼들 생각을 하지 않는가? 더구나 청익복왕 위일소에게 제자를 빼앗길 정도의 경계 수준이라면 몇 개 문파만 손잡으면 아미파를 습격하여 의천검을 차지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무림인들은 나중에 알게 된 것이긴 하지만, 의천검 안에는 구음진경과 항룡십팔장이, 도룡도에는 악비의 무목유서가 들어있었으니, 무림지존을 꿈꾸는 강호인들에게는 심지어 의천검이 더 가치 있는 것이다. 멸절사태의 의천검을 건드렸다가 아미파의 보복이 두려웠을리도 만무하다. 명교의 세가 전국에 걸쳐 있기에 오히려 아미파보다 명교(금모사왕 사손)를 건드렸을 때 위험부담이 더 크다. 더구나 무림인들은 아미파보다 더 존경을 받고 세력도 더 강한 무당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도룡도를 가진 사손의 행방을 이유로 작 중 최고 고수이자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장삼봉의 생일에 무기를 들고 쳐들어갔다. 그리고 십 년만에 돌아온 가장 아끼는 제자와 그 아내를 겁박함으로서 무당파와 장삼봉을 욕보인다. 그렇게 막무가내인 무림인들이 의천검을 가진 아미파와 멸절사태는 건드리지 않는 것은 모순 그 자체이다.
3. 장무기를 증아우로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집단 안면인식 장애
배경
장삼봉을 떠나 상우춘과 함께 호청우를 찾아간 장무기는 호접곡에서 의술을 배우다 유랑 중에 외딴 계곡에서 우연히 능가경을 입수해 구양진경을 수련하게 된다. 수 년이 지나 내공이 무척 심후해진 장무기는 주아를 만났을 때부터 이후 광명정을 습격하는 6대문파를 다 막아낼 때까지 본인의 신분을 '증아우'로 밝힌다. 혹여 본인의 신분으로 인해 다시금 무림인들이 사손의 소재에 광적인 집착을 보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 십 년이 지난 것도 아닌데 알아보는 이가 한 명도 없다.
의문
장무기가 장삼봉을 떠나 호청우와 함께 몇 년을 지내고, 또 계곡에서 구양진경을 수양하는 데 몇 년이 걸렸는지는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다만, 장무기가 열 살 즈음하여 장취산, 은소소와 함께 무당산을 찾았을 때가 장삼봉의 100세 생일이었고, 장무기가 명교 교주가 되어 조민의 공격을 막기 위해 다시금 무당산을 찾았을 때가 장삼봉의 110세 생일 즈음이었으니 장무기가 신분을 숨기고 강호에서 드러나지 않는 기간은 제일 길게 잡아봤자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장무기를 그토록 아끼며 현명신장 치료를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살을 맞대어 진기를 주입해주었던 무당 대제자들은 6대문파의 광명정 습격 당시 장무기가 모든 문파를 무찌른 뒤 은리정에게 '은육숙'이라는 한 마디를 내뱉기 전까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장무기가 무당의 경공인 제운종을 사용하자 '어떻게 저 사람이 무당의 경공을 알지?'하고 의문스러워하는데 그칠 뿐이다. 심지어 조민이 장무기로 위장하여 무당산을 공격했을 때, 장무기가 얼굴에 숯과 같은 것을 발라 시종으로 변장하였을 때는 장삼봉을 '태사부'라고 칭하며 나서는 데에도 장무기가 그새 한 명을 무찌르고 '선친이 장오협이다.'라고 외치기 전까지는 장삼봉과 유대암 모두 장무기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은육숙이라고 부를 때는 알아보고, 태사부라 부를 때는 못 알아본다?). 심지어 옷을 바꾸고 얼굴에 살짝 거무스름하게 발랐을 뿐인데, 불과 며칠 전까지 같이 있었던 명교 고수들(은천정, 양소, 위일소)조차 장무기를 단박에 알아보지 못한다. 이 정도면 모두가 집단 안면인식 장애 중증 수준이다.
이 정도의 괴이한 중증 안면인식 장애를 이해해보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 이유를 가늠하기 어렵다. 몇 가지 이유를 찾아보자면 첫째, 장무기의 공백기 동안에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얼굴이 많이 바뀌어 잘 못 알아볼 수도 있다. 어렸을 적 장무기를 금화파파와 함께 만났던 주아가 장무기를 무척 사모하면서도 증아우가 장무기임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그러나 장무기는 역시 어렸을 적 만났을 뿐인 주지약, 양불회와 재회했을 때 그들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챈다. 장무기 혼자 정상인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주아는 성인이 된 후의 장무기 모습을 봤으면서도, 영사도에서 어부로 변장한 장무기를 보고도 못 알아보니 증세가 심각하다.) 둘째, 장무기가 현명신장으로 인해 받은 내상이 워낙 심하고 치료방법이 전무하였기에 가까운 사람일 수록 오히려 더욱 장무기가 그 나이까지 생존하였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또한 셋째, 의천도룡기 세계관에서 고수들 끼리는 사용하는 무공의 초식, 보법만 보고도 어느 인물인지 짐작하는 것이 가능하니, 다양한 무공을 사용하는 장무기의 정체에 대해 더 혼란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장무기의 유년기 때 알던 이들은 대부분 고수들이다. 따라서 장무기가 구양신공의 내공에 기반한 무공을 펼치고 있음은 인식이 가능했을 것이며, 그렇다면 현명신장도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했을 법하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까지 생각을 하지 못한다.
4. 몰래 배운 절기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다.
배경
영웅문 3부작은 각각의 독립적인 이야기이지만, 1부(사조영웅전), 2부(신조협려)는 핵심인물들이 그대로 연이어 등장하는 반면, 2부(신조협려)와 3부(의천도룡기)도 우연히 능가경을 수련한 각원대사, 그리고 그에게 구양신공의 일부를 전수받은 장군보(장삼봉), 곽양(아미파 조사)의 이야기를 일부 공유한다. 각원대사와 소년 장군보의 이야기에서 핵심이 된 갈등 사항은 몰래 무공을 배워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화공두타가 소림사에서 몰래 무공을 배워 도주한 뒤 악랄한 짓을 저지른 선례가 있기에 소림사에서는 규율에 따라 몰래 무공을 배운 이에게는 무시무시한 형벌을 가하게 되어 있어, 장군보는 곤륜 삼성 하족도를 소림사를 위해 무찌르고도 각원대사와 함께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또한 3부 중심인물인 금모사왕 사손은, 칠상권보를 훔쳐 익혔다는 이유로 공동파와도 원수가 되어있다.
의문
이토록 무공을 제한된 이 외에 전수받는 것이 엄격히 금지된 세계관인데, 이상하게 의천도룡기의 장무기에게 만큼은 무척 관대하다. 장무기가 광명정 대결에서 그 자리에서 용조수를 흉내내었던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능가경에 기반한 구양신공을 펼쳤음에도 소림사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칠상권보를 훔친 사손에 대한 원한을 가진 공동파는, 문파 소속이 아님에도 사손에게 칠상권을 배워 칠상권에 조예가 깊은 장무기에 대해서 역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명교 교주 외에는 수련이 엄격히 금지된 건곤대나이 신공을 장무기가 7성까지 연마하여 6대문파의 대결에서 사용하였음에도 명교 고수들은 자신들을 구해줬다는 감사함과 기쁨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건곤대나이 신공을 익혔기 때문에 교주가 되어야 한다.'라는 선후관계가 뒤바뀐 억지 논리를 펼친다. 목숨이 경각에 다다른 시점에도 성화를 지키고, 교주만이 출입할 수 있는 비밀통로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규율을 중히 여기는 명교 고수들이, 허락도 없이 건곤대나이 신공을 익힌 장무기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그때는 양정천의 유서를 밝히기도 전이었다. 조민이 명교 장교주로 위장하여 무당산을 습격하기 전에도 장삼봉이 불구가 된 유대암에게 창안해낸 태극권을 최초로 전수할 때 시종으로 분한 장무기가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장무기는 장삼봉과 유대암이 보는 앞에서 조민의 부하와의 대결에 강호에서 처음으로 태극권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삼봉이나 유대암은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심지어 장무기가 태극권을 사용하여 대결한 상황은 장무기가 아직 본인의 정체를 장삼봉이나 유대암에게 밝히기도 전이었다. 즉,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이 무당파에 들어와 있는데, 무당파의 절학인 태극권을 허락도 없이 사용하는 상황에도 그저 덤덤히 반응하는 장삼봉과 유대암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5. 여주인공 조민은 희대의 악적. 무림의 원한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손이나 작중 메인 빌런 성곤보다 훨씬 더 악랄하다.
배경
작중 후반부로 갈 수록, 청순하고 아름다웠던 주지약은 질투의 화신이자 사악한 무공을 익힌 이로 그려지며 여주인공 후보에서 몰락하고, 조민은 장무기를 도우며 여주인공 자리를 굳힌다. 그런데 조민의 행적을 보면 성곤보다 먼저 단죄를 받아야 했을 정도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으며 그 방법조차 무척 사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주인공 버프를 받아 장무기를 비롯한 무림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의 악행을 망각해버리고 만다.
의문
조민이 얼마나 악랄하고 더러운 여자인지 그녀의 행적을 살펴보자. 그녀는 광명정에서 명교와 일전을 벌이고 돌아가는 6대문파의 고수들을 만안사에 가두고 이 과정에 고수들을 제외한 6대 문파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을 멸문에 가깝게 학살했다. 또한 무림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소림사를 습격하여 역시 많은 이들을 죽이고 납치했다. 만안사에 잡혀온 6대문파의 고수들에게 독약을 먹여 내공을 못 쓰게 한 뒤 목숨을 빌미로 그들의 무공을 익히고 그 무공의 파훼법을 익혔으며, 기대에 못 미친 고수들의 목숨을 뺏거나 손가락을 한 개씩 자르는 잔인한 악행을 저질렀다. 이 많은 악행을 명교에 뒤집어씌우려 했으며, 소림을 멸문에 가깝게 몰아붙인 것은 물론 무당도 멸문하려 했다 (장무기에 의해 저지당했다.). 소림사 공성대사의 경우 아예 대결에서 죽여버리기까지 했으며, 무당 육협 은리정도 사지의 뼈를 대력금강지로 절단하여 불구로 만들었다 (이 부분은 조민의 지시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가장 사악하고 악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민이 무당파를 멸문하려고 소림에 이어 명교 장교주로 위장하여 무당산을 방문하기 직전, 무당파 멸문을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해 부하를 시켜 장삼봉을 살인하고자 한 것이다. (이때 장삼봉은 큰 부상을 입는 데 그쳤지만, 장무기가 광명정에서 명교를 위해 싸운 것처럼, 무당산에서 무당파를 대신하여 싸우지 않았다면, 심각한 부상을 당한 장삼봉과 불구가 된 유대암 밖에 고수가 남아있지 않은 무당산에서 무당파는 멸문을 당했을 것이다.).
조민이 원나라 왕의 딸로서, 원나라에 대항하는 중원무림인들과는 불가피하게 대립하는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조민은 악한 부하들을 이끄는 가운데 중원을 노리는 원나라의 입장에서 단순히 명목 상 공주 노릇을 한 것이 아니라, 조민 본인이 주체적으로 이 악랄한 계획을 추진, 실행했다. 무림 고수들을 만안사에 납치해 가두었을 때, 여양왕과 그 아들이 고수들을 원나라에 복종시켜려는 의도를 실행한다는 명목 하에 조민은 대결 패배 시 손가락 하나씩을 끊는 잔악한 명령을 내리면서 각 문파 무공을 섭렵하고자 하는 단순한 호기심을 충족하려 했다. 6대 문파 말살 계획이 여양왕부 누구에게서 최초로 나온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 방법을 구체화하여 명교 교주로 분하여 소림과 무당을 멸하고자 부하를 이끌고 실행에 옮긴 최종 집행책임자는 분명 조민이다. 대력금강지로 무당칠협 중 두 명을 불구로 만든 이들(아대, 아삼 등), 도룡도를 얻기 위해 장무기를 납치하여 현명신장으로 수 년 간 괴롭게 만든 이들(현명이로: 녹장객, 학필옹) 모두는 조민의 직속 부하로서, 장무기가 교주가 된 시점에도 과거와 다를 바 없이 일관되게 악랄한 수법을 거듭해 왔다. 그것을 모두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조민은 전혀 죄책감을 느끼거나 만류한 적이 없다. (대체 착한 은소소는 왜 죽은 거야? ver. 1) 여양왕부에 고대사로 잠입하여 조민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오랜동안 지켜보았으며, 작중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정직하고 의로운 이인 광명우사 범요가 장무기에게 '조민은 독하고 악랄하니 조심하라.'라고 조언을 해줄 정도이다. 이러한 악랄한 조민을 영웅이 된 장무기를 향한 굳건한 사랑으로 희생을 보여준다 하여 어떻게 일거에 용서할 수 있는가? 용문표국 몰살과 유대암을 부상시킨 일로 은소소를 죽일 듯 몰던 무림인들이 아무도 장무기에게 저런 악랄한 조민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가? 왜 이런 악랄한 여자가 작중 히로인이 되어야 하는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의천도룡기 세계관은, 김용 소설 가운데 소오강호 다음으로 정파와 사파 간 대립이 극심한 설정이다. 이 때문에 강호의 존경을 받는 정파인 무당파의 오협 장취산과 사파인 천응교 교주의 딸 은소소가 부부로 맺어진 것에 무림인 전체가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정파와 사파가 아무리 갈등이 극심해도, 당시 시대상을 고려할 때 무림인과 원나라 군부와의 관계보다 극심할 수는 없다. 그런데 장무기는 존경받는 무당파의 제자이자 후손이고 무림 전체를 멸문의 위기에서 구해낸 명교의 교주임에도 중원 사람들 압제해온 원나라 여양왕의 딸과 교분을 나누는데 큰 반발이 보이지 않는다. (대체 착한 은소소는 왜 죽은거야? ver. 2) 은소소는 심지어 과거의 행위를 속죄하고 남편이 속한 무당파에 인정을 받기 위해 무당산으로 찾아가기까지 했는데 그와 같은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조민이 아버지(여양왕)와 조국(원나라)을 저버리고 장무기를 따랐다 하여 모든게 없었던 일이다시피 되어버린 상황이 무척 당황스럽다.
기릉향목으로 가짜 의천검을 구경한 명교 고수들을 중독시킨 것이나, 뼈가 부러진 데 명약인 흑옥단속고를 얻어내기 위해 부상당한 부하들의 몸에 일부러 흑옥단속고가 아닌 칠중칠화고를 발라놓은 것을 그저 조민이 절대적인 무력과 권력을 등에 업은 공주로서 자라오면서 얻은 자유분방한 성격, 장무기를 속으로 연모하여 짖궂게 그의 관심을 끌려한 행위로 작가는 가볍게 넘기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얼마나 악독한 짓인가? 유대암은 무림에서 알아주는 고수이자, 강호에서 이름난 의협이었는데 하루 아침에 조민 부하의 이십여년 전 행적으로 불구가 되어 수 십 년 간 혼자서 움직이지도 못한 상태였다. 심지어 그 사건은 장무기 부모의 사망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건이었다. 죄책감에 살아온 장무기가 또 다시 은리정이 똑같은 방법으로 불구가 된 것을 목도하기까지 했는데, 마침내 이를 치료하고자 조민의 부하의 부상부위에서 채취해간 약물이 치료약인 흑옥단속고가 아닌, '내장에 수만마리의 벌레가 뚫고 다니는 것처럼 괴롭다' 하여 지극히 악랄한 독으로 알려진 칠중칠화고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장무기로 하여금 치료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두 사숙(유대암, 은리정)에게 이 독을 바르게 만들었다. 심지어 흑옥단속고의 치료법은 부러진 뼈를 다시 한 번 부러뜨려 부러진 부위에 바르는 몹시나 고통스러운 방식이었는데, 거기에 악랄한 독까지 바르게 만든 것이다. 장무기를 속이기 위해 조민의 지시로 뼈가 부러진 부위에 칠중칠화고를 바른 채 대기하고 있었던 조민의 부하들(아삼, 아대)이 불쌍해지기까지 한다. 짖궂은 행위로 장무기의 환심을 사고 싶다지만 정말 방법이 이토록 악랄할 수 있을까. 장무기의 환심을 사거나, 무림 고수들의 무공을 훔치기 위한 욕심에 협박을 했다지만 (하지만 손가락은 실제로 잘랐고 숱한 각종 문파 문하를 학살했다.) 그 협박의 내용이 너무 사악하다. 주지약이 미인인데다 장무기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이유로 그 얼굴을 칼로 망쳐버리겠다고 위협했고, 죽이겠다고도 했으며, 멸절사태의 자존심을 꺾기 위해 아미파 제자들을 벌거벗기겠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멋대로 자란 공주라 그저 철이 없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지나치고 사악하다. 이처럼 조민은 살인한 사람의 수는 일부러 살인을 하고 다닌 사손과 비슷하고, 방법이 악랄하기는 제자(사손)의 가족을 겁탈하고 살인한 성곤과 비견할만하다. 이런 천하의 악적을 끝까지 예의를 갖추어 대하는 장무기는 김용작가의 말처럼 너무나 '우유부단'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리석게 보이기까지 한다.
바라건대, 의천도룡기는 어디까지나 열린 결말이므로, 차후에 장무기가 조민 바라기에서 벗어나 주지약을 다시 택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는 작품의 핵심인 의천검과 도룡도의 이야기와도 맥이 닿아있다. 조민(도룡도)을 제일 사랑하는 줄 알고 지내다가(무림지존 보도도룡 武林至尊 寶刀屠龍 호령천하 막감부종 號令天下 莫敢不從) 주지약(의천검)이 나타나는 바람에(의천불출 수여쟁봉 倚天不出 誰與爭鋒) 결국 조민을 버렸기를 바랄 뿐이다. 조민이나 주지약이나 어차피 악행을 저지른 것은 마찬가지이고, 둘 다 이에 대한 반성을 했다면 장무기는 희대의 악녀 조민보다는 당연히 주지약과 맺어져야 할 것이다. 악행의 정도와 종류, 숫자에서 전혀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민이 장무기에게 요청한 3가지의 약속 중 하나를 장무기와 주지약이 결혼하는 것을 막는데 썼으므로, 주지약 또한 본인이 단언한 대로 장무기가 들어주기로 한 한 가지의 약속을 장무기와 조민이 결혼하는 것을 막는데 썼기를 바란다. 김용 작가 역시 '네 명의 낭자 중 조민을 가장 깊이 사랑한 것 같으나, 나중에 주지약에게도 똑같이 그 말을 했고, 우유부단한 성격에 어떤 낭자를 제일 좋아하는지 아마 장무기 본인도 모를 것이다.'라는 작가의 말을 작품 뒤에 첨언했다.
이처럼 의천도룡기에는 합리적으로 전혀 이해가지 않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의천도룡기를 읽으면서 흥분하며 몰입해 읽는 이유는, '재미있다고 뇌가 이해하는 것'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들이 당연한 듯 전개되는 것에 대하여 생기는 극도의 짜증에 뇌가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두 개가 혼재되어 구분이 불가능할 때 흥분이 극대화되어 이 스토리를 각종 매체(책, 드라마, 영화)에서 접하는 이들이 그것을 합쳐 '흥미진진함'으로 인식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무서운 곳에서 이성에 고백하면 두려워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뇌가 상대방에 대한 호감으로 착각하여 성공률이 높다.' 라는 풍문과 비슷하다랄까. 이 오류사항들은 앞으로도 계속 업데이트 될 것이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와 같은 것을 올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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